2026년 4월 10일 금요일

최근 들은 음악 단평 (12)

1. Goatmoon – Voitto Tai Valhalla, Stella Polaris

 

 이전에 Goatmoon의 Death Before Dishonour에 대해 심드렁한 평을 남긴 적이 있었는데, 2014년 작업과 2017년 작업을 들으며 크게 반성했다. BlackGoat Gravedesecrator는 제법 독창적인 음악을 하며, 인종주의 문제만 아니면 벌써 대성했을 것 같다는 게 현재 의견이다.

 두 앨범 중 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2014년작인 Voitto Tai Valhalla다. 세컨드 웨이브 블랙 메탈, 스래시, 펑크(사실 이 두 가지는 RAC에서 왔겠지만), 헤비 메탈, 민요 같은 멜로디들이 섞인, 실로 근사한 음악을 들려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밴드가 보여주는 90년대 세컨드 웨이브 블랙 메탈 밴드들의 작법에 대한 헌사인데, 단순한 멜로디로 이루어진 주제를 반복해서 소환하며 곡에 통일성을 주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 앨범은 (물론 내가 라이트 리스너라서 예시를 잘 못 드는 것일 수 있으나) 묘하게 Burzum이 썼던 트릭들이 좀 드러나는 편이라는 감상인데, Way of the Holocaust Winds 같은 곡에서 키보드 주제 하나로 곡을 끌고 가는 부분이나, And the Tears of Our Fatherland Fall의 단순한 주제 하나를 계속 다시 소환해서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점이 특히 그렇다. Race of Heroes 같은 곡도 중반에 아예 다른 주제들로 갔다가 다시 초반부와 비슷한 주제로 돌아온 뒤, 보컬로 멜로디를 넣어주고 말이다.

 2017년작인 Stella Polaris는 더 노골적으로, 6~8번 트랙은 아예 어느 정도는 Emperor와 Gorgoroth 흉내내기로 느껴질 정도이다. 전반부도 전형적인 트레몰로 리프로 긴장감을 주다가 멜로딕한 헤비메탈 리드로 해소하든지 하는, 뻔하지만 싫어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차있다. 9번 트랙은 뭐하는 짓인가 싶지만, 안 들으면 그만이다.


2. Lucifugum - On the Sortilage of Christianity(원제: Нахристихрящях), Клеймо эгоизма

 

 Devildom이 망한 줄 알았는데, 아직 안 망했고, Lucifugum 초기작들을 싼 가격에 팔고 있기에 구입했다. 1~4집 모두 구했고, 전부 즐겁게 들었지만, 기록은 1집과 4집만 하려 한다(이 두 앨범이 다른 두 앨범보다 더 좋다는/낫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적으론 메탈과 클래식 음악이 무언가 연관 있는 양 하는 태도에 닭살부터 돋는 인간인지라, 소위 심포닉 블랙 메탈이니 하는 것에 대해 ‘심포니’보다는 영화 음악적인 영향이 크게 느껴지면서 키보드/신스로 락 밴드의 일반적 구성에서 낼 수 있는 성부를 초과한 다성부 메탈을 하는 것이라고 멋대로 적당히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Lucifugum의 첫번째 앨범은 정말 잘 만든 심포닉 블랙 메탈이다. 

 곡 구조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고, 제한된 수의 주제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멜로디 하나하나는 경쾌하다 못해 경박하고 모독적이고, 충분히 길이도 길어 지루할 틈이 없다. 다성부 음악으로서 여러 멜로디가 동시에 어울리는 부분들도 근사하다(메탈 덕후들은 ‘대위법’이라는 표현을 즐기겠지만, 나는 그런 평가를 할 정도의 음악 관련 교육 배경이 없다). 또 즐거운 점은, 이들이 신스 사용을 숨길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7번 트랙의 관악기처럼 들리는 무언가는 짧게,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긴장을 주는 ‘전자음’ 같은 용도로 쓰인다거나, 9번 트랙의 팀파니와 심벌즈 같이 들리는 무언가는 기타 리프의 피치 하모닉스 같은 용도로 쓰인 것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가 하면 기타도 키보드에 밀려 반주만 하는 것도 아니다. 5번 트랙 (제목도 무려 Волки. ‘늑대들’이다! 유치하지만 ‘메탈’답다)은 중반 부분에 아예 심포닉 블랙 스래시(?)라 할 부분까지 나온다. 

 이들의 네번째 앨범인 Клеймо эгоизма은 다른 방향으로 즐겁다. 기본적으로 블랙 스래시인데, 중간중간 포크 같은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에 더해 이들의 음악이 항상 그래왔지만, 보컬이 도드라져서, 마치 Vladimir Vysotsky의 음악 같은 느낌이 있다. 내가 뭐 ‘월드 뮤직’에 조예가 있어 아는 건 아니고 Vysotsky는 위대한 Vasily Alekseyev에게 헌정하는 노래를 냈기에 아는 것뿐이지만 말이다. 번역을 보면 전근대적 상징에 집착하는 실존주의적인 내용이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인데, 실로 구소련 출신다운, 그 어떤 거대 담론도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인식이 묻어나오는 것이 좋다. 원어민이 들으면 훨씬 감상이 깊어질 앨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족으로 Клеймо эгоизма의 보컬은 무려 그 Roman Saenko가 맡았다. 괜히 드는 생각은 Drudkh는 Saenko의 성향에 흐린 눈을 해주는 이들 덕에 나름의 유명세를 누리는 반면, Noktunal Mortum과 이념적 차이 때문에 결별한 Lucifugum은 어째서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인데… 뭐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3. Mooncitadel – Stardawn Usurper

 

 ‘블랙 메탈’이라는 용어와 관련해 Transilvanian Hunger 시절 Darkthrone이나, Burzum의 Jesus’ Tod 같은 트레몰로 리프 중심의 미니멀한 음악이 밈처럼 따라붙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블랙 메탈이 태생부터 가지고 있던 Mercyful Fate나 Venom 등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말이다. 핀란드의 Mooncitadel의 2025년작은 그런 면에서 아주 훌륭하다. 헤비 메탈의 영향을 숨기다 못해, 그냥 헤비 메탈 리프인 리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사실 저렇게 정리해버리기엔 좀 아까운 앨범이긴 하다. 30분 조금 넘는 길이에, 총 4곡, 그 중 메탈 곡은 2곡에 불과한 구성도 좋다. 첫번째 트랙은 포크 스타일로, 두번째 곡을 위한 인트로이고, 다른 한 곡은 세번째 트랙으로 드럼과 전자음으로 이루어진 던전 신스 트랙이다. 메탈 트랙들도 듣기 좋은 주제들을 다시 들려준다든지, 멜로딕한 부분과 스래시 스타일 리프로 이루어진 부분을 대비 시킨다든지 하는, 블랙 메탈 듣는 이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가득하다. 내 생각에 유일한 결점은 메탈 곡 두 곡 모두 곡 마무리 즈음 곡 제목을 강렬히 외치는 것이 조금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점 뿐인데, 그조차 장르에 충실하다는 증거라고 주장 못할 것도 아니다.


4. Opeth – Blackwater Park

 

 이게 25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Radiohead와 Muse, Nirvana, My Bloody Valentine 정도나 듣던 십대 시절에 접했던 생애 최초의 메탈 앨범 중 하나이기에, 새삼스레 당황했다. 시간이 참 속절없이 빠르다고 할지.

 굳이 단평을 적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앨범이고, 다시 들어도 당연히 좋았다(아니, Gojira나 Mastodon은 이제 와서 다시 들으면 별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연’하지는 않은가?). 특히 The Funeral Portrait부터 Blackwater Park까지의 후반부는 새삼스레 다시 감명(?!)까지 받았다. 어쿠스틱 부분과 클린 보컬이 아무 맥락 없이 튀어나온다느니, Blackwater Park가 불필요한 반복 때문에 쓸데없이 길어진 곡이라느니 비판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 그게 좋단 말이다. 

 이에 더해 나이 먹고 느끼는 것 두 가지는, Opeth는 정말 한순간도 ‘데스 메탈’ 밴드였던 적이 없고, 굉장히 Mikael Åkerfeldt의 개인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는 밴드라는 것이다.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락과 사이키델릭, 포크 덕후가, Morbid Angel의 리프 샐러드와 Entombed(및 스웨디시 데스 메탈 밴드들의) 음향적 측면에 영향 받은 것을 더해 프로그레시브 락 복각을 하고 있는 게 Opeth인 것이다.

 그리고 위의 맥락에서 오히려 Opeth가 굉장히 메탈-적이라고 생각도 한다. Opeth의 음악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과거의 락 음악을 복각하면서도 펑크와 관련된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배제하는 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웨디시 데스 메탈에서도 음향과 Dan Swano의 프로그레시브 덕후 같은 부분만 골라서 가져왔으니 말이다. 이 밴드가 결국 딱 중산층의 지루한 삶을 살 것 같은 이들이 안락의자에 앉아 들을 법한 음악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중음악의 ‘저항’이니, ‘해방’, ‘민중’, ‘공동체’, ‘진보’, 계급’ 등등 같은 멍청한 허례허식 없이 근사한 연주와 과장된 곡들로 그저 상품을 소비하는 청자만 남긴다는 점에서 나름 메타-적이고, 반-반문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요점은 뭐… 나는 Opeth가 좋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Opeth에 대한 감상도 그렇고, Goatmoon 같은 밴드가 펑크와 스래시를 지극히 반동적이고 끔찍한 이데올로기에 봉사하게끔 만드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 보면, 내가 그냥 펑크를 싫어하는 것일 수도 있다.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최근 들은 음악 단평 (11)

 1. Grenadier – Wolves of Trench

 

 Arghoslent 카피 밴드로 유명해진 Grenadier의 2025년 신작이 나왔다. 이 밴드의 1집은 그저 인종주의 걱정 없이 듣는 Arghoslent의 대체재로서 묘사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사실 듣다보면 묘하게 Arghoslent와는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약간 덜 데스 메탈 같다고 해야 할까…  좀 더 모던한 멜로딕 데스 메탈 같은 부분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2집은 그런 부분들이 보다 강화되어 있다. 분명히 Arghoslent 스타일의 멜로디가 전체 앨범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긴 한데, 다른 부분들은 2000년대 후반 이후의 Amon Amarth 같은 부분(‘Unmarked Graves of the Autochthonous’의 브레이크 다운과 클린 보컬이 나오는 부분), 블랙 메탈 같은 리프가 나오는 부분 (‘Red Civil Ensign’의 도입부), 펑크와 펑크의 영향을 받은 헤비 메탈 조류의 영향이 느껴지는 부분 (‘Wolves of Trench’의 코러스 부분), 유치하게까지 들리는 헤비 메탈 솔로가 나오는 부분(‘Red Civil Ensign’의 후반부) 등의 다양한 시도들이 보인다. 그와 동시에, 데스 메탈적인 부분들은 더 줄어들었고, 사실상 데스메탈과 공유하는 건 절-후렴 없이 여러 리프들을 느낌에 따라 이어놓은 곡 구조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매우 듣기 좋고 편한, 언더그라운드 메탈 씹덕들을 위한 ‘팝’ 메탈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매우 좋다. 

 주제도 메탈 밴드들이 보다 보편적으로 다루는 주제들에 집중하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비판과 애수를 담거나,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하는데, 어찌 보면 Arghoslent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팝 메탈로 만드는 게 이들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좀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면, 사실 펑크 같이 들리는 부분들도 RAC 영향으로 만들어 놓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그 Arghoslent를 참고해 멜로디를 짜는 밴드이니 말이다)… 물론 이건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2. Absurd - Asgardsrei

 

 위 앨범을 들으며 새삼스레 RAC 생각이 나서, 가지고 있는 앨범 중 몇 안 되는 RAC 관련 앨범인 Absurd의 앨범을 굳이 꺼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것저것 수집할 때에 2008년 Nebelfee Klangwerke에서 재발매한 것을 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순전히 그 유명한 ‘The Original Absurd’의 앨범이라서 구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RAC와 페이건 블랙 메탈의 선구자 격인 밴드로 유명하니 말이다. 

 사실 전반적으로는 내게 매우 낯선 장르이니(Absurd 앨범도 이것 밖에 없다 – 굳이 따지면 페이건 블랙 메탈 관련해서 Graveland 정도나 일종의 메탈 역사 교양 수업 과목을 듣는 것처럼 들어본 게 전부다), 크게 적을 글은 없지만, 이 앨범을 청취하는 것이 제법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경험이라고 생각은 한다. 좋지 못한 프로덕션에 펑크와 헤비 메탈에 포크 스타일의 멜로디를 섞은, 단순하고 선동적인 곡들을 펼치는 스타일이, 이후 양산된 밴드들 때문에 소위 ‘똥블랙’이니 하며 폄하 당하긴 하지만(그리고 이는 정당한 비판이지만), 고전으로 유명한 밴드들은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제법 창의적으로 들린다. 물론 내 귀가 역사적 권위에 굴복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3. Ildjarn – 1992-1995

 

 미학적으로 흥미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블랙 메탈을 이야기할 때에, Ildjarn을 빼놓을 순 없다. 이 앨범은 고등학생 때 구해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십대 시절의 허세 덕에, 한동안 Ildjarn, Profanatica, Incriminated 정도만 들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론 이게 Ildjarn이 유치한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나 듣는, 얕은 밴드라는 것은 아니다.

 Ildjarn이 흥미로운 지점은, 한편으로는 Burzum이 Filosofem에서, 그리고 Darkthrone이 Transilvanian Hunger에서 시도했던 미니멀한 전자 음악의 영향에 기초한 블랙 메탈 작법을 어느 정도 선취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Havohej와 Profanatica의 Paul Ledney가 보여주는 – 사악한 데스 메탈과 펑크의 영향 하에서 만든 ‘헤비’한 단순함을 보여주는 부분들이 부분부분 섞여 있다는 점이다. 후자는 그저 베이스가 튀어서 그렇게 느끼는, 피상적 감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블랙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즐기는 그.. ‘안티 뮤직’ 같은 부분을 잘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그런 방향의 미학을 선호하는 경우엔 그라인드 코어도 있지 않냐고? 지루한 좌파 프로파간다보다는 그저 증오에 찬 비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길 바란다.


4. Anhedonia – Irreversible Collapse, Heinous Acts of Terror

 

 Anhedonia는 흥미로운 밴드다. 미시간에서 2024년에 설립된 밴드인 주제에, 1990년대 중반 뉴욕 데스 메탈(특히 Repudilation)과 빗다운 하드코어를 섞어놓은 음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두 장의 EP 모두 짧은 곡들 안에 올드스쿨 데스메탈 스타일의 멜로디와 90년대 슬램 리프, Repudilation과 Cerebral Hemorrhage 같은 밴드들이 보여준 통통 튀는 스네어 드럼의 변칙적인 박자, 그리고 빗다운 하드코어식의 브레이크다운이 다 들어있다. 데스 코어 밴드들이 이런 음악을 했어야 할텐데, 다들 Dimmu Borgir나 따라하고 있다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다.


2025년 2월 13일 목요일

최근 들은 음악 단평 (10)

1. Muhammad Pedophile - Deislamize

 

 Muhammad Pedophile은 영어권 웹에서 최근 제법 ‘핫’한 블랙메탈 밴드이다. 밴드 이름과 앨범 이름, 앨범 아트에서 알 수 있듯, 이 밴드는 극단적인 안티-이슬람 밴드이며, ‘Edgelord’들이 가득한 것이 블랙 메탈 팬덤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하겠다(그리고, 나는 이들의 입장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주장해본다). 물론 안티-이슬람 컨셉 자체는 Svolder 같은 NSBM 밴드도 이미 시도한 것이고, 심지어 Ayat처럼 중동 지역 출신 밴드도 있다(레바논 출신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밴드가 유명세를 탄 이유는, 컨셉의 특이함에 더해 음악이 제법 좋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 쪽의 고전적인 세컨드웨이브 블랙 메탈 같은 리프와 Grand Belial’s Key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리프들이 고루 나오며, 곡 구조는 복잡하진 않고, 제법 미니멀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루하진 않다. 6곡으로 깔끔하게 끝내는 구성도 좋다.

 물론 마지막 소품으로 들어간 곡, 웹 상의 루머들, 그리고 레이블(ASRAR)를 고려할 때에 북미권의 미친 인종차별주의자가 만든 음악일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메탈의 문제는 거의 항상 창작자들이 미친놈들이라는 것인데, 이런 장르 전반의 상태에 대해 가끔 지칠 때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다.


2. Dehumanizing Itatrain Worship - Otakuslam♡Animecide

 

 슬램 데스 메탈 향유층과 아니메 향유층의 교집합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이미 많은 슬램 밴드들이 아니메, 특히 ‘Guro’라고 부르는 이미지들을 자신들의 컨셉으로 적극 활용해왔고, 중국의 Dehumanizing Itatrain Worship(이하 DIW)은 2010년대 중반부터 러브라이브 시리즈의 이미지를 활용해오며 웹 상에서 종종 ‘바이럴’을 타곤 했다. 사실 2010년대에 이들이 낸 곡들은 다 그저 그랬기에, 개인적으로는 앨범 아트만 보고 별 이상한 밴드가 다 있다고 생각한 게 다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인간들은 중국에서, 일본 아니메 캐릭터들과 관련된 컨셉을 잡고, 지극히 미국적인 장르인 슬램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들이 2023년 낸 첫 풀렝쓰인 Otakuslam♡Animecide는, 확실히 듣기 좋다. 아니, 사실 너무 듣기 좋아서 문제다. 당연한 것이, 슬램에 더해 데스코어, 트랩 메탈을 다 섞어 놓았으며, 각 씬의 온갖 유명인사들을 불러 만든 곡들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Gorepot의 Larry Wang도 참가했다. 개인적으로는 Gizmo도 좋아하기에, '$moke Halation' 같은 곡도 좋았다. 'Eien Parasites'라는 곡을 위해서는 Vulvodynia를 불렀고, 당연하게도 곡 중간에 녹음 연도를 외친다! Winds of Plague의 죄가 깊다고 하겠다.

 사실, 위에 적은 Muhammad Pedophile 같은 밴드를 듣는 이들은, DIW의 이 작품 같은 것은 메탈 취급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웃긴 것은 그들이 DIW의 음악을 듣는 이들보다 집합적으로 더 사악한, 질이 나쁜 인간들일 것이라는 점이다.


3. Sabbat – Sabbaticult

 

 메탈갓 Gezol 선생님께서는 40년 동안 메탈을 하셨음에도 여전히 악상이 떠오르시는지, 2024년에도 풀렝쓰를 내셨다. 물론 컴필레이션이나 스플릿 등만 줄창 냈었지, 정작 마지막 풀렝쓰는 2011년 Sabbatrinity이니, 조금 과장하면 13년이나 걸린 복귀작이 될 테다. 

 Sabbat의 풀렝쓰들의 재미있는 점은, 소위 ‘언더그라운드’스러운 밴드의 이미지와 다르게, 사실 Gezol이 제법 완벽주의자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는 것이다. 모든 앨범들이 매우 좋고, 꾸준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Sabbaticult도 마찬가지이다. 첫 트랙인 ‘Sabbaticult’부터 재미있다. 단음 몇 개를 트레몰로로 연주하는, Burzum 초기작이 생각나는 리프로 시작하기에, 블랙 메탈을 하는 것인가 싶다가도, 후렴이라 할 부분에 묘한 보컬의 멜로디가 이 곡이 단순한 블랙 메탈 곡이 아니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곡 중반 이후 기타 솔로를 기점으로 어느 순간 스피드 메탈이 되었다가, 후렴이 나왔다가, 다시 스피드 메탈 같이 마무리된다. 그리고 두번째 곡인 ‘Desecration’은 세컨드 웨이브 블랙 메탈 리프와 블랙-스래시 리프가 나오다가, 갑자기 Slayer 같은 스래시 리프가 나오기도 하고, 멜로딕한 스피드 메탈 리프가 나오기도 하는 식의, 총천연색을 보여준다. 첫 두 곡을 연달아 듣는 것만으로도, 흔히 메탈 돼지들이 ‘메탈 같은 메탈’을 생각할 때에 듣길 기대하는 모든 요소들이,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엮여서 소개된다. 실로 장인의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가장 단순한 곡일 ‘Black Metal Tornado’ 같은 곡도 초반 리프는 1980년대의 Sabbat을 연상 시키는 헤비 메탈 리프를 들려주다가, 곡 중반부부터는 기기묘묘한 멜로디들을 들려주고, 다시 돌아오는 형태의, 1집 Envenom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구성을 보여준다든지, ‘Sabbatrinity’ 같은 곡은 Motörhead가 생각나게 한다든지 한다. 요점은 뭐, 메탈갓이 괜히 메탈갓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4. Ihsahn - Ihsahn

 

 Ihsahn의 솔로 프로젝트는 블랙 메탈 덕후들에게는 엄청나게 비난을 받지만, 사실 그 ‘비난’들이 쉬이 이해가 되진 않는다. Emperor의 In the Nightside Eclipse는 훌륭한 작품이지만, 정작 Ihsahn 본인에게는 만 20세가 되기도 전에 만든 블랙 메탈 앨범일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개인적으론 Ihsahn의 솔로 프로젝트를 항상 즐겁게 들어왔다. 일단 1집과 2집이 각각 2006년, 2008년에 나왔으니, 십대 시절 들었던 영향이 크다. 뭐든 추억 보정이 중요한 법이니까. 개인적으로는 Ihsahn 솔로 프로젝트의 강점은 음악, 음향 덕후들에게 파고들 요소들을 제공하면서(이건 사실 추정이다), 나 같은 라이트 리스너에게는 ‘이지 리스닝’ 음악처럼 들리는 음악을 만든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생각 없이 듣고 있으면, 그냥 좋다. 이 앨범에 유독 ‘영화 음악’ 같다는 평이 많은 것도 이런 방향성이 극대화 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다. 이에 더해 개인적으로 Ihsanh의 이 앨범은 심술궂은 생각도 들게 하는데, Wintersun 같은 밴드의 음악의 프로덕션과 ‘에픽’함을 극찬하는 이들이 이 앨범을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적어도 나에겐 Wintersun의 그 어떤 작품보다 이 앨범이 더 좋게 들린다.


2025년 1월 20일 월요일

잡문 #26 - 최적의(Optimal) 운동 방식을 찾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

 핏플루언서들이 다른 과학적, 근거 기반 핏플루언서들을 공격할 때 흔히 하는 주장 중 하나는, 최적의 운동 방식에 집착하는 것의 효용이 적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근거로 하며 말이다. 그저 열심히, ‘빡세게’ 하면 된다고 하며 말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다르기에,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최적의 운동 방식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과학적, 근거 기반 핏플루언서들이 이야기하는 식의 ‘최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볼륨, 빈도, 강도 등등을 어떻게 조절했을 때 ‘최적’인지 하는 것은, 실제 살면서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조금이라도 받은 이라면, 과학적 방법론에서 변수를 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냥 조금이라도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삶에서 변수를 통제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내 생각에는, 각 개인에게 최적인 운동 방식을 이야기할 때에,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사회적, 재정적인 부분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만약 누군가가 근비대와 미용을 목적으로 운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근비대에 고볼륨이 최적이라느니, 고빈도를 가능케할 정도의 저볼륨이 최적이라느니 하는 주장들은, 이 사람이 현재 어떤 사회적, 재정적 배경을 가졌는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어진다. 이 사람이 (스스로가 처해있는 사회적, 재정적 환경에 기초하여) 자신의 여가 시간 중 어느 정도를 운동에 쓰고 싶은지에 따라 소화할 수 있는 볼륨과 빈도가 결정될 테니 말이다. 이에 따라 어느 정도 조절해야 그나마 최적일지 찾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주일 동안 운동에 3~4 시간만 쓰고 싶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엔 저볼륨, 고빈도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는 일주일 동안 10시간 정도를 운동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 경우엔 고볼륨 프로그램을 계획해줄 수 있다.

 그리고, 위에 이야기한 누군가가 자녀 계획도 끝났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는 이라면, 단순히 훈련 방식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PED 사용도 고려하는 것이 최적의 운동 방식을 찾는 데에 필요할 수도 있다. 약간의 남성호르몬과 성장호르몬 사용, 그리고 혈액 검사 수치를 정상 범위에 맞추는 정도의 여러 약물 사용, 또는 감량을 위한 GLP-1 agonist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최적’일 수도 있다. 오히려, 적당히 단순한 프로그래밍과 함께, 의사와 처방전에 돈을 더 쓰는 게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 ‘최적’의 운동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최적의 운동 방식이 주 2회 이상 주당 총 10~20세트 정도를, 목표하는 근육군의 근섬유가 최적의 내부 레버리지를 가지게 되는 운동 자세로 기계적 장력이 걸리게 하며, 점진적 과부하를 하는 것, 이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2024년 12월 18일 수요일

잡문 #25 - 이상한 생각들 #3

 #1 장르의 완성

 최근 Wagner Ödegård의 음악을 들으며 든 생각으로, 장르의 완성이라 부를 만한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Wagner Ödegård의(그리고 그의 다른 프로젝트인 Tomhet과 Wulkanaz의) 음악은 분명 듣기 좋다. RAC, 펑크 같은 느낌을 기초로, Burzum부터 이어진 ‘앳모스피릭’한 느낌(사실은 전자 음악을 재현한 것뿐일 수도 있지만)을 낼 때도 있으며, Darkthrone의 Transilvanian Hunger 시절 같은 미니멀리즘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로덕션도 Graveland 같는 밴드의 느낌도 나는 것 같을 때도 있고 그렇다.

 정말 듣기 좋지만, 어디선가 다 들어본 것 같다는 것이다. 더 나은 것은 없고, 근본적으로는 같지만, 약간의 개성 덕에 듣기 좋은, 그런 느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의 완성’이 소셜 미디어 시대를 거치며 드디어 파워리프팅, 그리고 보디빌딩 훈련법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과연 파워리프팅 훈련법의 ‘메타’라고 할 것에 더 이상 바뀔 것이 있을까? 2010년대 중반부터 소셜 미디어 상의 유행에 따라 DUP가 유행하고, 그 이후엔 모두가 블록 주기화에 치우쳤다가, 왜인지는 몰라도 근비대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유행한 이후, 2020년대에는 모든 요소들이 적당히 섞인, 논리적으로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훈련법이 정착한 것 같지 않나?

 보디빌딩 훈련법도, 소셜 미디어 상 피트니스 컨텐츠의 범람으로 PED 관련된 정보까지 광범위하게 공유된 덕에 더 이상 혁신적으로 나아질 것이 없어 보일 때가 있다. 이를 테면 John Jewett이나 Dr. Todd Lee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더해 보다 ‘혁신적’인 것이 나올 여지가 있어 보이는가?

 세부적인 디테일, 실천 방법 등의 변화는 계속 있겠지만, 이건 말 그대로 상위 1%에서 경쟁하는 리프터들에게나 도움이 될, 지극히 개인화 되어 있는 것이고, 죽을 때까지 중급자 수준에 머물 재능 밖에 없는 이들에게는 큰 의미 없는 정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르의 완성’ 덕에 이미 완성된 ‘메타’에 충실한 사람을 고용해 몇 번의 ‘매크로 사이클’만 함께 하고 나면, 더 이상 무언가 더 알아도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아닐까?



 #2 근비대 훈련 = 일반적 근력General Strength 훈련?

 특정 동작에서의 근력은 특이한 적응이라는 것은 이제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적 근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반적 근력’을 위한 훈련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있긴 하다. 평범한 근비대 훈련이 그것이다. 근육이 커지면 당연히 근육이 내는 힘도 커지니까. 그리고 최대한의 근비대를 위해 훈련하면 결국 다양한 관절 각도, 다른 스트렝스 커브를 가진 다양한 동작들, 다양한 반복 횟수 구간들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오히려 특정 동작들(흔히 파워리프팅 종목에 오버헤드 프레스가 추가된다)에만 집중하는 것보다 다양한, ‘일반적’인 상황들에 대해 저항 운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 아닐까?

 여기에서 ‘근비대 훈련’이 보디빌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디빌딩은 개념 상 보디빌딩에 특화된 근비대 훈련을 포함할 뿐, 근비대 훈련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저 미용 목적으로, 몸이 좋아지고 싶은 사람들이 하는 훈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흔히 보이는, 보디빌딩 훈련에서 시합과 관련된 부분들을 거의 다 제외한 훈련 방식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취미로 다른 스포츠 – 일상에서 개인적으로 흔히 접하게 되는 사례는 골프, 테니스, 그리고 (웃기지만) 주짓수다 – 를 하고 있는데, 이에 더해 힘을 좀 더 기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경우, 그냥 피로를 최소화하는 근비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행동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사-파워리프팅 프로그램이 아니라 말이다. 


2024년 11월 26일 화요일

잡문 #24 – 가장 멍청한 동작

 가장 멍청한 동작이란 바로 터키시 겟업을 말한다. 정확하게는 중량물을 들고 하는 터키시 겟업이다. 겟업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벤트 프레스만큼 멍청한 운동인데, 적어도 벤트 프레스는 20세기 초반~중반에 유행하기라도 했으며, BAWLA 같은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시합을 열기라도 했었으니 겟업보다는 (아주 근소하나마) 낫다.

터키시 겟업으로 키울 수 있는 체력은 결국 어깨 안정성과 지구력 정도가 전부다. ‘코어의 활성화니 뭐니 해도, 결국 겟업으로 강하게 만든 코어는 겟업이라는 동작에 대한, 특이한 적응에 불과하다. 겟업 동작의 근력이 강해지겠지만, 이 근력이 다른 분야에 전이가 크다고 주장하는 것은 판타지 소설에 가깝다.

근비대의 관점에서도, 너무 많은 근육군들이 참여하며, 결국 어깨의 가동성과 안정성 때문에 사용 중량이 제한된다는 점에서 절대 좋은 운동이 될 수 없다.

이제 누군가는 두번째 문단에서 언급된 전이를 다시 끄집어내어, 그래플링 종목을 하는 경우 겟업이 나름 특이성을 갖춘 동작이 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주장이, ‘특이성에의 이해 자체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래플링 종목에 가장 특이성을 가진 훈련은 그래플링 종목 스파링이다. 그리고 그래플링 종목 중 그 어떤 동작도 한 쪽 어깨에 중량이 실린 상태에서 일어나는 동작이 없지 않나? 어떻게 겟업이 특이하다는 것인가?

결국 겟업을 지지하는 주장은 일반적 근력을 주장하는 것 정도의 빈약한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격투기 선수나 다른 운동 선수의 예시를 드는 것은 약한 주장이 된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한 두 가지 사례는 아웃라이어에 불과하니 말이다. 존 존스의 예시를 들며 박스 스쾃과 데드리프트 1RMMMA 선수에게 좋다고 주장한다면 딱히 똑똑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겟업이 얼마나 좋은 동작인지는 직접 해봐야 안다는 말도 의미가 없다. 나는 이미 135파운드 바벨로 겟업을 해봤으니까. 겟업 동작을 해봐야, 일정 중량 이상에서는 겟업 기록만 오르고, 다른 어떤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심지어 개인적으로는 벤트 프레스 기록에도 전이가 없었다.

물론, 어깨의 안정성과 가동성은 중요한 체력 요소이다. ‘코어에의 인지(이게 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지만)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미 훌륭한 대안이 제시되어 있는데, 무려 댄 존이 제시한 것이다. 바로 물을 반쯤 담은 종이컵을 주먹 위에 올려놓고 겟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댄 존이 체력 훈련과 관련해 천재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2024년 11월 19일 화요일

잡문 #23 – 이상한 생각들 #2

1. ‘인자약’들이 피해야 하는 것


 ‘인자약’들이 쇠질 훈련 계획을 짤 때에 가장 피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피로다.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근비대 훈련을 하게 되면, 피로로 인해 운동 단위 동원이 제한되게 되고, 이는 근비대를 방해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동원되지 않은 근섬유가 커지기는 어렵다.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근력 훈련을 하게 되면, 역시 피로로 운동 단위 동원이 제한된 상태에서, 가장 효과적인 자세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의 신경계는 피로가 쌓인 상태 하에서의 효과적이지 못한 자세를 익히게 된다. 

 결국, 훈련 효과(적응)이 있을 정도의 과부하를 주되, 피로를 최소화하는 것이 쇠질 훈련 계획에서 가장 근본적인 고려 사항이 된다.

 이제, 가장 멍청한 짓은, 딱히 나은 적응을 주는 부하도 아니면서 피로가 큰 행위를 중심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중 대표적인 것이 고반복 세트들을 통한 고볼륨 훈련이다.

 만약 당신이 뭘 해도 기록이 오르고 몸이 좋아지는, ‘선수님’ 유전자라면 사실 상관 없다. 그러나 당신이 소위 ‘인자약’이라면? 고반복 세트들로 하는 고볼륨 훈련은, 다람쥐 쳇바퀴나 다름 없는 짓이 될 것이다.



2. ‘내추럴’의 기준


 ‘내추럴’의 기준이라는 것은 사실 모래 위에 선 긋기와 같다.

 우선, 그저 취미로 쇠질을 하는 이가 있다고 할 때에 ‘내추럴’은 대략, 보충제, 영양제 정도는 섭취하되, 쇠질에서의 퍼포먼스를 올리는 약물은 사용하지 않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보충제, 영양제’라는 기준조차 모호한 것이다. 베르베린을 섭취해 인슐린 저항성을 개선하는 경우는 어떤가? 혹은 극한의 다이어트 중에 L-카르니틴을 주사해서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것은? 둘 모두 그저 영양제 수준에 지나지 않는 성분이니 괜찮은 것인가? 또는, 처방전을 받아 ADHD 치료제를 복용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암페타민이지만 시합에서도 TUE를 받을 수 있으니 괜찮은 수준인가?

 그래도, 상기 사례들은 WADA 금지 약물도, 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 약물도 아닌 그저 영양제이니, 또는 치료를 위한 합법적 약물 사용이니 괜찮아 보인다. 사실 적당히 생각하면 AAS나 펩타이드 호르몬 정도만 안 쓰면 ‘내추럴’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추럴’의 기준이 더 모호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소위 ‘내추럴’ 시합에 나가는 ‘선수님’들의 존재이다.

 WADA 기준 하에서 테스토스테론에 대해서 내인성 호르몬의 양을 기준으로 테스트를 하지 않고, T:E 비율을 기준으로 테스트를 한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T:E 비율이 4:1를 넘으면 무언가 약물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하여, 추가적인 테스트를 시행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유명인의 사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UFC 182 시점의 다니엘 코미어다(UFC 182 당시 도핑 테스트 결과지는 다음을 참고하라: https://www.mmafighting.com/2015/1/23/7880561/official-documents-from-jon-jones-daniel-cormier-ufc-182-drug-test). 코미어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2014년 12월 2일에는 50ng/ml, 12월 17일에는 70ng/ml, 2015년 1월 3일에는 13ng/ml, 그리고 2015년 1월 4일에는 7.1ng/ml였다.

 간단한 구글 검색으로, 남성의 테스토스테론 정상 범위가 2.7~10.7ng/ml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 코미어는 UFC 182 시점에 만 35세였다. 종합격투기라는, 극한의 고볼륨 훈련이 강제되는 스포츠를 하며, 시합이 가까워져 감량까지 고려해야 하는 만 35세 남성이 정상 범위의 거의 7배가 되는 테스토스테론 수치를 보여줬다가, 1개월만에 정상 범위로 돌아온 것이다.

 LH도 보면, 2014년 12월 2일 39.2mIU /ml, 12월 17일 45.7mIU/ml, 2015년 1월 3일 7.6mIU/ml, 1월 4일 6.4mIU/ml로 널뛰기를 한다. 역시 간단한 구글 검색으로 건강한 남성의 소변에서 LH 정상 범위는 7.11 ± 5.42 IU/L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기한 테스트들 모두에서 다니엘 코미어의 T:E 비율은 항상 0.5를 넘지 않았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하자면, Rogerson et al., 2007이 있다(https://pubmed.ncbi.nlm.nih.gov/17530941/). 9명의 20대 남성에게 체중 1kg 당 3.5mg의 테스토스테론 에난테이트를 매주, 총 6주 간 주사한 연구로, 6주 후 9명 중 4명의 T:E 비율이 WADA 기준인 4:1보다 낮게 나왔다.

 

 









  


 


 상기 연구를 통해 재인용하자면, Weatherby et al., 2002는 이렇게 밝힌다: “근력 훈련을 받는 운동선수들이 12주 동안 테스토스테론 에난테이트를 투여 받았을 때, 30m 스프린트 테스트에서 향상을 보였다. 잠재적으로 더 중요한 발견은 테스토스테론 투여가 중단된 후 12주 후에도 스프린트 능력에 대한 향상 효과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소변 T/E 비율이 기준선으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것은, IFBB Natural 대회의 기준이다. T:E 비율을 무려 6:1까지 봐주기 때문이다(https://ifbbprokorea.com/rules/doping/). 

 여기까지 읽었다면, 영어권 핏플루언서들이나 코치들이 농담처럼 쓰는 ‘Sports TRT’라는 용어에 어째서 ‘Sports’가 들어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추럴’ 시합들의 도핑 테스트 규정 자체가 자연적인 내인성 테스토스테론으로 가능한 수치보다 훨씬 높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까지 ‘내추럴’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적당한 수준의 외인성 테스토스테론 사용까지는, 적어도 ‘선수님’들 수준에서는 ‘내추럴’인 것처럼 보인다(물론, 코미어의 경우는 LH 촉진제 같은 것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리고 위의 연구들이 에난테이트를 가지고 한 것이며, 2020년대 보디빌더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프로피오네이트, 인슐린 주사 바늘, 매일 하는 마이크로 도징을 기억하면, 더더욱 이 상황이 재미있어진다.

 물론, 도핑 테스트 기술 자체는 위와 같은 사례를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 예를 들자면, 위 사례들의 경우 탄소 동위 원소 분석을 해버리면 된다. 대부분의 외인성 테스토스테론 약물은 식물성 원료를 가지고 만드니 말이다. 불행하게도 이 경우에도 ‘로무새’적 음모론은 가능하다. 어떤 미친 인간이 동물성 콜레스테롤을 원료로 하여 테스토스테론을 합성하고 이를 유통 시키고 있다면, 이를 도핑 테스트로 적발하는 것이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정신 나간 주장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이에 더해, 세상 그 어떤 협회도 모든 선수들에 대해 비싼 테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예산이 없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 이런 상황에서, 나처럼 취미로 운동을 하는 이와, ‘선수님’들 간 ‘내추럴’의 정의조차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내추럴’이 얼마나 모호한 단어인지!


2024년 11월 7일 목요일

잡문 #22 - 볼륨, 용어 혼란 전술

 쇠질 관련하여, 세트 수로 볼륨을 따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만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근비대와 관련하여 힘든 세트 수를 기준으로 볼륨을 따지는 것이지, 이게 근비대 훈련 외에 다른 것에도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볼륨은 그저 훈련량을 뜻하는 용어로,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경우에는 거리로 볼륨을 측정할 것이고, 장거리 사이클을 하는 경우에는 특정 Watt/kg 강도 구간 별 훈련 시간으로 볼륨을 측정할 것이다. 그리고 근비대와 관련해서는 힘든 세트 수를 기준으로 볼륨을 따지는 것이 가장 의미 있을 것이라는 합의가 있기에 많은 연구들이 힘든 세트 수를 기준으로 볼륨을 측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근력 훈련에 바로 적용할 때이다. 

 역도가 되었든, 파워리프팅이 되었든, 특정 리프트의 1RM을 목적으로 하는 훈련에서는 실패 지점 근처에도 가지 않으면서 1~3회를 수행하는 세트를 제법 많이 수행하게 된다. 이 경우, ‘힘든 세트 수’를 기준으로 하는 근비대 볼륨 계산과는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실패 지점 근처에도 가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구소련 시스템에서의 역도,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동유럽 쪽 파워리프팅의 경우 NL (Number of Lift)를 사용하는 것이다. 특정 강도에서 총 몇 회를 들었는지, 연습한 양을 추적하기 위해서 말이다.

 또는 Load-volume 그러니까, 중량*횟수*세트로 계산되는 ‘tonnage’를 추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적어도 일의 양을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어차피 시합 종목은 두 종목, 아니면 세 종목이니 이 종목들의 tonnage만을 추적하면 더 많이 했는지, 적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근비대 훈련의 볼륨 계산법, 이를 테면 Dr. Israetel이 만든 볼륨 랜드마크 – MV, MEV, MAV, MRV – 를 근력 훈련의 볼륨 계산법으로 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 없이 그저 ‘볼륨’만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이 일종의 ‘용어 혼란 전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냥 적당히 ‘볼륨을 늘려야 합니다’ 하는 식의 내러티브가 넘쳐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재능이 있다면 이런 구분 따위 신경 안 써도 꾸준히, 열심히 하면 언제나 남들보다 잘 들게 되니, 적당히 볼륨을 늘리고 성적이 좋은 리프터들은 언제나 존재하게 되며,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다들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특정 리프트의 1RM 향상을 위한 훈련의 경우 근력을 위한 연습으로서 하는 시합 종목과 그 가까운 변형들의 볼륨은 가능한 한 높아야 하지만, 근비대를 위한 볼륨은 그렇지 않다든지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는 분리하여 논의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싶다(완전 분리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최근 공개된(Pre-print 상태이지만) 근비대 훈련 볼륨 관련된 메타회귀분석(https://sportrxiv.org/index.php/server/preprint/view/460/967) 을 보면, 근비대 세트수가 부위별로 주당 4 세트를 넘어가는 경우에는 근력 향상에서 한계 효용(?)이라 할 것이 급감한다. 심지어 저 4 세트는 프레스 동작 1 세트를 상완 삼두근 관련해서 0.5 세트로 세는 식으로 해서 나온 수치이다. 근력 향상을 위한 볼륨이 이미 처방되어 있는 경우, 근비대를 위한 볼륨(액세서리를 통한)이 높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이에 더해, 조금 더 과장해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특정 리프트의 1RM 기록이 목표인 경우, 근력을 위해서는 제법 높은 볼륨이 필요하지만(무식하게 이야기하면, 뭐든 연습을 많이 해야 는다), 근비대를 위해서는 오히려 볼륨이 높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2024년 10월 16일 수요일

잡문 #21 - 무책임

 쇠질 훈련법과 관련하여 가장 무책임한 말은, 적어도 내 생각엔, 이것이다:

 ‘근비대를 해라’

 이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근비대는 특이성에 구애를 매우 덜 받는, 매우 ‘관대한’ 적응이니 말이다. 흔히 ‘과학적’으로 밝혀진 근비대 훈련 강도의 범위부터 생각해보면, 무려 5~30RM이다. 효과가 있는 볼륨 구간은 (최적의 볼륨 구간이 아니라, 훈련 효과가 있는) 말 그대로 주 당 부위별 1~2 세트 정도부터 무려 50여 세트 사이가 된다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 이런 상황에서 ‘근비대를 해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5~8회 1~2세트부터, 25~30회 50세트 사이 어딘가를 해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결국 훈련 계획은 빈도, 강도, 볼륨, 그리고 특이성이 모두 동시에 고려되어야 하니(‘FITT’ 원칙이다! 고전 그 자체다!), 그저 근비대를 하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현재 훈련하는 방식, 그리고 훈련의 목적을 고려해 빈도, 강도, 볼륨, 특이성을 모두 고려하여 그에 따른 근비대 훈련을 계획해주어야 할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근비대를 해라’ 하는 것은 실로 무책임한 말인 것이다.

 그리고 위에 기초해 다른 무책임한 말들도 더 생각해볼 수 있다:

 ‘볼륨을 늘려라’

 ‘빈도를 늘려라’

 ‘스트렝스를 길러라’

 차라리 재능을 타고났어야 한다고 조언해주는 건 어떤가?


2024년 10월 10일 목요일

『조커: 폴리 아 되』 감상

 우선 나는 영화에 대해 완전히 문외한임을 밝힌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내 인생 최고의 영화 5편은 『아드레날린24』, 『아드레날린24 2』, 『올드 보이』, 『좋은 친구들』, 그리고 『파이트 클럽』이다. 그저 유명하거나 폭력적이면, 혹은 둘 모두인 경우에 무작정 좋아한다는 뜻이다. 감상, 또는 평론과 관련하여 별도의 고등 교육 학위도 없고, 학부 전공이 사회학과 철학이었다는 것 정도가 그나마 언급할 만한 배경일 것이다.

 길게 썼지만, 사실 변명이다. 이 글이 아무 의미 없는 글이라는 것에 대한 변명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조커: 폴리 아 되』 감상문을 쓰는 이유는 사실 하나이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평론가들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니 하는 헛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평범한 영화일 것이고, 주제 넘게 평론가와 일반 소비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에 더해 개인적으로는 뮤지컬 장면이 나올 때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완결성을 좋아하며, 『조커: 폴리 아 되』는 전작인 『조커』의 서사를 이어 받아 깔끔하게 완결 시켰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시청자의 실망을 의도하고 있다. 전작은 주인공 아서 플렉의 불행과 불운으로 시청자를 압박하다가, 조커로의 각성과 폭력, 살인을 통한 해방감을 주었다(이게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는 떠나서 말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로서 행동하는 장면들은 망상 속 뮤지컬이 대부분이고, 현실 법정에서도 조커 흉내만 낼 뿐이다. 나는 이 영화가 이를 통해 전작에서의 조커를 그저 망상, 또는 연극으로 만들며(또는, 연극으로 인식 시키며-있어 보이는 말로는 ‘소격 효과’일 것이다) 전작의 해방감을 기대한 시청자들을 의도적으로 실망 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실망감을 통해 얻는 효과는 전작과 이 영화를 연결해서 보았을 때 시청자가 느끼는 감정의 수미상관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의 구성이 클라이맥스의 해방감까지 시청자를 고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었다면, 이 영화는 클라이맥스의 허탈함까지 시청자를 하강 시킨다. 즉, 전작의 시작 지점, 아서 플렉이 바닥을 치던 시점에 시청자가 느끼던 감정까지 다시 되돌린다는 것이다.

 수미상관 이야기가 나와서 언급해야만 할 것이, 이 영화가 전작과 수미상관을 이루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전작에서 주인공이 쓰러진 상태에서 시작했던 것처럼, 이 영화도 주인공이 쓰러진 상태로 끝난다. 전작에서 조커로의 각성이 3명의 취객들이 가하는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이 영화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가 허상임을 인식하는 것도 3명의 간수들이 가하는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아예 전작의 센세이셔널한 장면이었던 화장실에서의 춤 장면과 관련해서 이 영화에서는 그 후 아서가 분장을 지우는 장면을 보여주고, 조커로 각성하여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에 대해서는 조커이길 포기하고 리를 찾아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이 대비되어 제시된다. 전작에서 시청자들을 고양시킨 모든 장면들에 대해 물리적으로 반대되는 장면을 보여주어 의도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일차적인 감정의 침잠, 그리고 수미상관을 고려한 연출(상승과 하강)을 통해 얻는 새삼스러운 재인식이 있었다. 바로 이게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에게 실로 걸맞는, 개연성이 있는 서사라는 것이다. 전작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끼는 한편, 머릿속에서는 ‘결국 불행과 불운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정신질환자가 미쳐서 사람 죽이고 수감된 것 아닌가? 이게 만화책 속 수퍼 빌런이 될 순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영화는 이를 다시금 상기 시킨다. 이에 더해 이 영화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영화 속 사회에 존재하는 일종의 현상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제목부터 그렇고, 아무 맥락 없이 터지는 폭탄 테러,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의 사건과 이를 주도하는 인물의 존재도 그렇다. 이 영화 속 세상에서는 아서 외에 누구든 조커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조커를 소비해주고, 숭배하며, 성적으로 욕망하는 리의 존재는 이 지점을 더더욱 강조한다. 이를 통해 아서 플렉은 그저 외로움과 소외가 개인을 어떻게 만드는가 보여주는 인물이 되며, 전작에서의 상승과 이 영화에서의 추락을 통해 하나의 캐릭터로서 완결된다.

 영화 속 세계에서 아서는 모든 ‘억까’란 ‘억까’는 다 당하니, 이 영화 시리즈는 구체적으로 외로움과 소외를 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전작과 이 영화를 사회 비판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공감이 어렵다. 현실에서 개개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의 원인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사회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될 수도 있으며, 실연의 경험이 될 수도, 거절에 대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그리고 아서는 전작과 이 영화에서 말 그대로 이 모든 것을 다 당한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외로움과 소외는 결국 정신병을 부르고, 폭력과 파괴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자신을 향한 것이든, 타인을 향한 것이든 말이다. 

 이에 더해 나는 전작과 이 영화에서의 ‘사회 비판’은 현대 미디어에 한정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느꼈다. 배경이 198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작에서 아서가 출연하게 되는 TV쇼는 마치 현대의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매체처럼 그려진다. 애초에 아서가 조그마한 코미디 클럽에서 공연한 영상이 남아 TV쇼에 오르는 것 자체가 영상 촬영과 공유가 쉬운 현대에나 가능한 일 아닌가?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아서의 재판은 ‘세기의 재판’으로 명명되어, 적어도 카메라 안에 비춰지는 이 영화 속 세상 사람들이, 현실의 사람들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또는 유명인이 연루된 재판의 과정, 이를 테면 조니 뎁과 앰버 허드의 재판 과정을 소비했던 식으로 아서의 재판을 소비한다는 느낌을 준다. 심지어 영화 속 세계에는 아서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언급까지 나온다. ‘불특정다수가 (현대의 미디어를 통하여) 그저 쾌락을 위해 누군가의 외로움과 소외에 따른 울분을 소비하는 것 – 이것이 조커를 낳는 단초가 된다’ 라는 메시지를 읽게 된다. 재미있게도, 만화에서의 조커는 실로 모범적인 극장형 범죄자 아닌가?

 다시 아서로 돌아와서, 이 영화의 하강의 종착지는 앞서 언급한대로 아서가 쓰러져 죽어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외로움과 소외로 미친 인간의 종착지는 결국 파멸 뿐이라는 뻔한 사실이 다시금 시청자들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비벼진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해하려 노력해주는 타인 없이는 미쳐버린다. 그리고 전작과 이 영화에서 강조된다고 느끼는 것은, 소비는 이해가 아니고, 숭배도 이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리라는 캐릭터에서 보이듯 페티시도 이해가 아니다. 아서가 타인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있지만(적어도 아서는 노력한다 – 난쟁이 개리의 존재가 이를 보여준다), 영화 속 그 누구도 아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부조리하게도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죽음만이 기다린다. 이해하려는, 이해 받으려는 노력을 해도 실패할 수 있는데, 사람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젠장, 『신세기 에반게리온』… 또 너야?